Others/읽고 끄적이는 '책꼬리'

[2018.3]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Amandaniel 2018. 3. 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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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됐다.


- 김연수 -



01 여섯 개의 상자로 정리된 추억


"시간이 지나도 세계는 남아있잖아요. 골목이라든지, 이런 곳엔 이야기투성이라는 거죠. 물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제 소설에서 일반적이에요. 이야기가 숨어있으니까, 우리가 모를 뿐이죠. 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카밀라라는 애가, 뭔가 있을 것 같은 사진에서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가는 거잖아요. 그런 방식이 제가 이야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철학 같은 도입부랄까 그래요." - 김연수 인터뷰, 알라딘 2012-

나는 첫 도입부인 이 부분을 보면서 유이치가 카밀라에게 글을 써보기를 제안한 장면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야기가 많은 삶을 가진 카밀라에게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제 글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찾게 해준다. 하루에 3페이지씩 꼬박 써서 그녀의 글에 근육을 만들어주는 일. 나에겐 왠지모를 설렘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보기에 여전히 시덥잖은 나의 이야기도 카밀라가 그랬듯이 매일 매일 꼬박 쓴다면 언젠간 근육이 생기겠지.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냥 순간의 유익을 주는 정보성의 글보다, 한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아 일렁이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연습을 한다.  




02 카밀라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인 거지"

나는 이 부분에 있어, 별 다른 어려움을 찾진 못했다.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지라는 이 말이 그녀에게 어려움을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이 한 마디가 '카밀라'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을 주는 소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카밀라에게는 네가 왜 네가 됐는지 대답을 누구도 못해주고 있잖아요.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인 거지' 이런 답은 무책임한 얘기인 거죠. 이 아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되는 존재예요. ... '너는 이야기가 없는 애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니까, 첫 제목은 이 아이가 정체성이 없는 아이임을 말하고 싶었어요." 

이 글을 쓴 사람과, 이 글을 읽는 사람. 김연수 작가의 의도와 받아들인 나의 시선은 달랐다. 본래의 작가의 의도처럼 읽진 못했어도, 이런 부분을 알아가는게 꽤 재밌다. 한번 읽고 덮어버리는 책에대해 항상 마음이 쓸쓸했는데, 이제 조금 곱씹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03 바람의 말 아카이브


이 작품은 카밀라와 희재가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이야기를 기워 모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있다. 

"진실이란 게 존재한다고 봐요. 그렇지만 한번 살고, 그 뒤에 사람들이 회상을 하잖아요. 그건 진실이 아니라고 봐요. 똑같이 회상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거든요. 서로서로 얘기가 다 다른거고요. 진실은 있는데, 우리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결국엔 스스로 채택한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소설가가 서사를 만들듯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의 서사를 채택해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거죠.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어쨌든 한 가지 방법을 택해서 그게 내 인생이라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자기 인생의 진실은 자기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달려있는 거겠죠. 수많은 눈도 있고 소문도 있을 거고요… 자기가 자기 인생을 어떻게 쓰는가, 이게 중요하고, 그게 진실이 되는 거죠. 우리가 입양아처럼 드라마틱한 상황이 아니니까, 자기 정체성을 처음부터 추적해봐야 할 경우는 잘 없지만, 대신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찾아왔겠죠. 입양아인 카밀라의 시선처럼, 우리도 구성된 삶을 살고 있는 건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참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렇다 진실은 언제나처럼 존재하고 진실을 기점으로 무성한 소문이 자라난다. 진실이 없다면 소문도 없겠지. 그러나 그 진실은 또 언제나처럼 찾기 어렵다. '진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과 소중함은 그 것을 찾아내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김연수 작가는 인터뷰에서 "결국엔 스스로 채택한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한다. 진실은 있지만, 그걸 회상하는 시점과 회상하는 사람에 따라 채택되는 진실은 다르다. 그래서 작가는 "자기 인생의 진실은 자기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달려있다"고 이야기 했다. 어렸던 나는 나의 과거를 회상할 때, 어려웠다. 좋아던 부분보다 상처받았던 나를 앞세워 회상했다. 그래서 나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항상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런데, 작가의 이 말이 내 마음에 일렁였다. 지금의 나는 상처받았던 어린시절의 나를 놓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내가 잘했던 일들, 어린 내가 행복해하던 일들, 어린 내가 좋아했던 일들을 모아 나의 어린시절의 진실로 보관하고 싶다. 어쨋든 우리가 구성된 삶을 때마다 살아가기 마련이라면.  




04 예고없는 시점 변화


작품은 언제나 일관되게 1인칭 시점이다. 그러나 화자는 예고없이 변한다. 처음 시작은 '카밀리아'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다 어느정도 책이 흥미진진해 질 즈음, 작가의 시점은 누군가로 변해있다. 카밀라였다가, 희재였다가, 지은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시점은 무언가 좀 더 관조적인 느낌이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차분해진다. 그리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지은이 함께하지만,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이 분명하기에 더 쓸쓸하다. 너의 모든 걸 보고 이야기하지만, 난 그저 이야기 할 뿐이라는 건조함이 외롭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바다가 파도에게 어찌할 순 없다. 바다는 파도를 포함하고 있지만, 파도는 바다에 속해있지만, 바다는 파도를 멈출 수 없다. 아니 모르는 일이다. 바다가 파도를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파도는 파도 스스로 움직이고 멈추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지은도 희재에게 그런 존재였다. 속해있으나 속해있지 않고, 함께 있으나 함께있지 않았다.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파도를 어찌할 수 없는게 바다였고, 그래서 그 파도를 그냥 안고 있는게 바다의 일이었다. 지은도 그렇게 희재를 생각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손 닿을 순 없지만, 지은 안엔 희재가 있었다. 그런 희재를 생각하는게 그녀의 일이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인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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