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됐다. - 김연수 - 01 여섯 개의 상자로 정리된 추억 "시간이 지나도 세계는 남아있잖아요. 골목이라든지, 이런 곳엔 이야기투성이라는 거죠. 물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제 소설에서 일반적이에요. 이야기가 숨어있으니까, 우리가 모를 뿐이죠. 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카밀라라는 애가, 뭔가 있을 것 같은 사진에서..